시월에게, 그제 파주운정호수에 있는 에코온에 갔어. 거기 일하는 동료들을 만나러 갔지. 시월에게,
그제 파주운정호수에 있는 에코온에 갔어.
거기 일하는 동료들을 만나러 갔지. 마침 찬희의 생일이 막 지났던 터라 생일 케익도 하나 준비해야 했어. 나는 그 동네가 익숙치 않아서 거리를 한참 걸어서 베이커리를 찾았고, 구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온기가 남아 있는 빵과 케익을 각각 양손에 들고 걸었지. 공기는 찬물처럼 차가웠지만 뒹구는 낙엽과 온갖 색깔로 옷을 갈아입은 나무들에 마음이 홀려 기분좋게 걸었어. 오랜만에 보는 호수공원의 나무와 공기, 마른 풀과 조용히 군데군데 피어 있는 꽃들이 어찌나 정겹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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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익을 먹고 동료들과 일하다가 점심을 먹으러 다녀오고 커피를 마시고 또 일을 하다가 에코온 뒤뜰에 있는 ‘에코온뜰’ 정원도 보러 갔어. 퍼머컬처를 공부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작은 정원이지. 그 프로그램 진행을 도왔던 정민이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했어. 노랗거나 보라빛이거나 한 국화들이 더러 피었고 (한두 가지 다른 꽃들 이름은 모르겠어.) 땅에 떨어진 낙엽들은 발 밑에서 서걱서걱 기분 좋은 소리를 냈지. 도토리를 부지런히 줍고 나무 위아래를 오가며 먹는 청설모 두 마리가 보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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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다가오자 에코온을 나섰어. 에코온은 호수공원과 뒷산(이 산 이름도 잊어버렸네.) 사이에 위치해 있어. 높게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나야 올 수 있지. 다리를 지나 집으로 가려는데, 아침의 찬물 같던 공기가 달라졌어. 얼음물처럼 얼얼하게 온몸을 파고들었지. 아직도 맨 다리를 드러낸 치마 차림의 나는 깜짝 놀랐지. 차가운 바람이 사방 나무들을 사납게 흔들고 윙윙 소리를 내며 기세를 자랑했어. 버드나무 부드러운 가지들이 휘청거리고 뽕나무와 느티나무는 할 수 없이 매달고 있던 몇몇 잎들을 떨구어야 했어. 그제야 알아챘지. 네가 이제 곧 떠날 채비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서울에는 올해 첫 한파주의보가 내렸다는 것을 들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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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고마웠어. 매해 만나는 너지만 올해는 유독 더 고마운 생각이 들어. 여느 해보다 더 찬란하고 아름다운 날들이 많았지. 시월 너는 파랗고 파란 하늘과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과 붉은 열매들을 매단 나무들과 비가 내릴 때 더 짙은 향기를 뿜는 꽃들을 내주었지. 깨끗한 마른 행주로 잘 닦은 것 같은 달님과 자신의 일부를 물감에 풀어 그림을 그린 것만 같은 해님의 붉은 노을이 내 마음을 황홀하게 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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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네가 머무는 동안 좋은 일들도 많았어. 개천절에는 내 조카 지은이 결혼을 했고, 지난 주말에는 내가 존경하는 김원 박사님 따님도 결혼했어. 결혼을 하는 신랑신부들은 그들 스스로 준비하고,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잔치에 초대했지. 그들 부모는 물론이고 주위 분들을 흐뭇하고 행복하게 했어. 나는 지은 덕분에 제주 가족들과 며칠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 <가능한 사랑>이나 <이방인> 같은 좋은 영화들도 보았고, 서촌 골목에서 줄을 서서 고로케도 사먹고, 카페에서 거리에 내놓은 작은 의자에 앉아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기도 했어. 그 때만해도 거기를 오가는 관광객들은 선글라스에 반팔 차림도 많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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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에게 준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아.
우선 날씨가 정말 좋았지. 감탄하고 또 감탄하며 네 곁에 머물렀지. 꽃들은 또 얼마나 많이 피어나던지. 야생동물들도 더 자주 다양하게 만나는 것 같았어. 지난 달 보았던 흰목물떼새도 중랑천에서 다시 만났어. 진천 미호강에서는 드디어 하늘다람쥐 귀여운 모습도 보았어! (나는 이 귀여운 존재를 이름으로만 알았지 뭐야. 눈이 얼마나 크고 예쁜지 몰라.) 수달과 삵도 여러 번 만났지. (이 아이들은 하도 자주 나오니 이제 신비감은 사라졌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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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일도 편하게 할 수 있었어. 중랑천의 우중가 선생님들은 매일매일 많은 일을 했어. 미호강에서는 연반장님네가 생태공원의 꼴을 갖춰가는 일을 꾸준히 했지. 안양천에서도 드디어 첫 활동을 했어. 환삼덩굴과 단풍잎돼지풀을 정리하고, 쓰레기도 치웠어. 이 날 오전 내내 잔뜩 흐려서 비가 내리면 어쩌나 걱정했어. 그런데 너는 구름을 살살 달래서 다른 곳으로 보내주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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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다정한 시월이라도, 네가 좋은 것들만 줄 수는 없었을 거야. 좋은 것들만 주면 그 가치를 모를 수도 있고, 허투루 낭비할 수도 있어서 그럴까. 너는 더러 마음 아프고 속상한 것들도 주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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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면식도 없지만, 우석훈 박사님의 야옹구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어. 고양이든 강아지든 혹은 새든, 우리가 마음으로 들인 존재들은 다 소중하니까.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새가 나오잖아. 인선이 키우는 왕관앵무 두 마리인데 아마와 아미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 인선은 친구에게 제주도에 가서 새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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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네가 머무는 동안 주위에 갑자기 아프거나 다친 사람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이들, 그리고 이런저런 상심과 고민에 젖은 이들도 있었지. 멀리 프랑스에서는 소요 사태가 여전해서 내게 근심을 드리웠지. 전쟁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여전히 너무 많고, 가까이는 정치인들의 거칠고 저열한 싸움들, 불쑥불쑥 베어지거나 병드는 나무들, 난개발이 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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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월 네 곁에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달리기를 하고 책을 읽었어. 글도 조금 썼어. 어제는 김멜라 작가의 소설집 <이응 이응>을 읽고 있었어. 소설이 재치있고 은근히 유머도 있어 재미있게 읽었지. 그러다 작가가 궁금해서 (이름도 독특하잖아) 프로필을 보는데, <멜라지는 마음>이라는 산문집이 있더라. 그래서 어라, 그럼 김멜라라는 이름이 ‘멜라지는’ 이 단어에서 왔을까 궁금했지. 검색해보니 그게 맞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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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지다’는 제주도 말이거든. 육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말이 반가웠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쓰던 말들이 떠오르고 그리움에 사로잡혔지. 메르쌍 내불라. 멜라불라. 드르쌍 내불라… 이런 말들. ‘메르쌍 내불라’는 ‘함부로 쓰러뜨려 던져두라’ 정도의 뜻이야. 비슷하게 ‘드르쌍 내불라’는 대충 던져두라는 말이고… (이 말을 들은 누군가는 “드르쌍 내불라… 남편에게도 해당하나요?” 라고 해서 다들 웃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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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지는 마음들에 대해 생각했어. 누군가의 거친 말, 베어진 나무, 총탄에 죽어가는 목숨… 또는 가까운 이들과의 이별… 이런 것들로 하루에도 몇 번 마음이 멜라지는 사람들이 있지. 그런 멜라지는 마음에 위로를 보내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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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그동안 고마웠어. 잘 가고, 내년에도 좋은 것들을 가져다주길 바라. 슬픈 것들은, 누군가의 마음을 멜라지게 하는 일들은 아주 조금만 부탁할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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