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애인 선생님들께. 며칠 날이 추웠지요. 그제 언니랑 통화하는데 제주도에는 눈이 내렸다고 해서 깜짝 놀
2025. 11. 20.
은미씨의 한강편지 325_배추와 백석
한강애인 선생님들께. 며칠 날이 추웠지요. 그제 언니랑 통화하는데 제주도에는 눈이 내렸다고 해서 깜짝 놀
은미씨의 한강편지 325_배추와 백석
축제를 기다리는 중랑천 원앙들 ⓒ최종인
어제는 눈이 많이 내렸어.
아 진짜? 그럼 첫눈인데… 사진 찍었어요?
아니. 내일이면 쌓일 것 같아.
사진이라도 보내줘 언니. 그리고 눈길에 닝끼리지마랑 조심허곡.
한강애인 선생님들께.
며칠 날이 추웠지요. 그제 언니랑 통화하는데 제주도에는 눈이 내렸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일상의 일들로 바쁘게 지내는 중에 어느 틈에 겨울이 자박자박 걸어왔구나 싶었죠. 오늘부터는 좀 누그러진다고 하네요. 건강에 각별히 유의하시길 바라요.
주말에 성동원앙축제를 앞두고 주말 날씨가 어떨지, 비는 내리지 않을지, 너무 추워서 오시는 분들이 힘들지 않을지 내내 마음을 졸였습니다. 주말엔 좀 풀린다고 해서 마음을 놓고 차곡차곡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갑자기 12월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축제 현장 점검만도 여러 번
그제 18일에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서 발견된 큰기러기 사체 한 마리. 큰기러기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 검출되어 서울시는 철새보호구역이 있는 지자체들과 생태공원 관리 기관들에 공문을 보냈어요. 각별히 방역 관리를 하라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야생조류 서식지역 인근의 탐조활동·생태 교육 행사·프로그램 운영을 중단 또는 연기’해달라고 하네요. 성동원앙축제에서는 체육공원에서 쌍안경으로 멀리 있는 새들을 탐조하는 활동이라 안전한데도 이런 서울시 지침이 있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연기해야 했어요.
축제 사흘을 앞두고 연기되어 불편과 혼선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몇 달 전부터 부스 운영을 위해 준비해온 15개의 지역 단체들이나 서점들, 주민들은 난감해졌고, 주말 내내 자원봉사를 해주겠다고 신청한 100명 가까운 청년들에게 12월에 와줄 수 있는지 물어야 했어요. 산새마을 도연스님은 축제 때 쓸 재료와 강의 준비를 진작부터 해서 다 마쳤고, 탐조대회 전문 강사님들은 진행 방식과 내용에 대하여 논의에 논의를 거듭했어요. 축제 준비위원회를 맡은 이은진 대표님과 정희 팀장님은 현장에 여러 번 가서 점검하고 시간대별 동선을 짜기도 했어요.
중랑천의 새들 ⓒ최종인
현수막을 건다, 포스터를 만든다, 인스타 홍보를 한다, 시민들을 위한 기념품을 준비한다, 자원봉사자들과 스탭들 도시락을 주문한다, 새들 서식지 주변 정화 활동과 볍씨 뿌려주기를 한다 등등 축제 전에 할 일이 끝도 없이 이어졌어요. 하지만 축제는 12월 중순으로 미뤄졌습니다. 어렵지만 할 수 없지요. 다시 힘을 내서 더 힘차게 준비하는 수 밖에요… 문화예술 기획자이신 은진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괜찮아요. 12월이니 송년 분위기도 내고 예쁘게 축제장을 장식해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냅시다. 더 아늑하고 즐겁게 할 수 있어요.”
이런 말씀을 듣고 나니 걱정이 좀 누그러졌습니다. 어려운 상황도 긍정의 힘으로 이겨나가는 한강애인들이 존경스럽습니다.
# 배추와 백석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백석 시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첫눈이 내리고 본격 겨울이 오기 전에 집집마다 김장 준비가 바쁘지요. 배추와 무, 젓갈과 마늘, 고춧가루 같은 재료들을 사느라 어머니들이 분주합니다. 이런 풍경은 오래된 것이어서 백석이 살던 시절, 백석의 어머니도 그러하셨던 모양입니다. 젊은 시인은 멀리 타향에서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며 어느 추운 겨울 밤 이 시를 쓴 것 같아요.
그는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추운 날에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는 모습을 애틋하게 그리워합니다. 우리가 먹는 김장김치에는 고향과 어머니라는 향수가 여전히 배어 있지요.
재미있게도 다음 주에 한강의 집에 배추와 백석이 옵니다. (백석 시인은 오래 전 돌아가셨으니 시인이 오지는 못하고 시가 옵니다.) 올해 진천 미호강변에서 연태희 반장님이 심어 키운 배추가 잘 자랐습니다. 연반장님은 미호강에서 자연을 돌보는 일이 분주한 터라 배추농사에 공들일 겨를은 없었습니다. 하여 속이 단단히 야물지는 않았지만, 농약을 치지 않고 자연이 키운 것이고 우리가 방류한 어린 미호종개들과 같이 미호강물을 먹고 자란 배추입니다.
담주 월요일에 염키호테 대표님이 트럭에 한가득 배추를 싣고 옵니다. 그러면 수요일(11.26) 한강살롱이 있는 날에 배추를 나누어 드려요. 배추를 얻어가시며 새들을 위하여 밥값을 조금 보태주면 더 좋겠죠. 이 날 살롱에서는 백석의 시를 낭송하고 시인의 삶을 이야기하게 될 거예요. 미호강 배추와 백석이 있는 자리에 오셔서 추워지는 겨울을 너끈히 이길 온기를 얻어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