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470년, 조선 남원 땅에 양생이라는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결혼도 못하고 만복사의 동쪽 방에서
2025. 10. 30.
은미씨의 한강편지 322_원앙 편지
때는 1470년, 조선 남원 땅에 양생이라는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결혼도 못하고 만복사의 동쪽 방에서
은미씨의 한강편지 322_원앙 편지
원앙부부 날다 ⓒ최종인
물총새 쌍을 이루지 못해 외로이 날고
원앙도 짝을 잃고 맑은 물에 멱을 감네.
누구의 집에 약속 있나 바둑 두는 저 사람
한밤 등불꽃 점을 치며 창에 기대어 시름하네.
(김시습 <금오신화> 수록 ‘만복사에서 저포놀이를 하다’ 부분)
때는 1470년, 조선 남원 땅에 양생이라는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결혼도 못하고 만복사의 동쪽 방에서 홀로 살았습니다. 양생은 달빛이 그윽한 밤이면 배나무 아래를 서성이며 시를 읊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물가에 비친 버드나무 그림자와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나는 멱을 감고 있었습니다. 내 짝을 잃은 지 어언 보름이 지난 날, 나는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가에 나와 멱을 감는 동안 양생은 나를 멀거니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았지요. 짝과 함께 노닐던 나를 볼 때면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보던 그가 이제는 자기 처지와 같아진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남편과 나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유난히 춥고 먹을 것이 없던 그 해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낟알 하나 찾을 수 없던 빈 땅을 뒤지던 그가 조금 멀리 가봐야겠다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짝을 잃은 원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밤 시름과 허기에 지쳐 잠든 후 나 역시 먼 세상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원앙부부 다정하다 ⓒ최종인
555년 세월이 지나 나는 다시 세상에 왔습니다. 희부연한 빛이 주위에 감돌고 알 수 없는 소음이 사방에 깔린 중랑천 인근에서 태어났습니다. 늙은 나무 위 둥지에서 어미는 나를 부지런히 먹이고 키웠습니다. 나는 다른 형제들보다 더 식탐이 많았습니다. 전생의 허기가 여전히 기억에 맴돌아 이번 생은 사람으로 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작은 원앙의 몸을 지니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군요.
가을이 되어 나도 어엿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나는 무리들을 따라 중랑천으로 나왔습니다. 물이 야트막하게 흐르고 군데군데 모래톱이 있으며 버드나무 곁으로 꽃이 흐트러지고 벌과 나비가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강가가 있었습니다. 날이 추워지면 사람들이 강둑에 먹을 것들을 뿌려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멀리 강가에는 남자들 몇몇이 풀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치우고 있습니다. 그곳에 볍씨가 넉넉히 뿌려질 거라고, 뜨거운 햇살과 바람을 먹은 볍씨는 단단히 여물어 고소하다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원앙이 말을 해줬습니다. 자기는 작년에도 덕분에 배를 곯지 않고 잘 먹었다고, 올해는 일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난 걸로 보아 볍씨도 넉넉할 거라고 장담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친숙하여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555년전 먹을 것을 찾아보겠다고 멀리 떠났던 나의 짝이었으니까요.
중랑천 강가에서 ⓒ최종인
# 나는 지푸라기
온 힘을 다해 소년을 떠받쳤네 지푸라기일 뿐이지만
무지개…… 무지개 같은 심장이 되어주고 싶었지
물을 토해낸 소년이 구급차에 실려 떠난 뒤
아득한 마음 강둑에 누워
내가 소년을 구한 것이 아니라
소년이 나를 구했다는 걸 알았지
(김선우 시 ‘지푸라기의 시’ 부분)
나는 지푸라기, 강물 위를 정처없이 떠돌며 떠도는 삶이 어쩐지 싫다고 생각하는 지푸라기. 작은 씨앗에서 태어나 봄의 햇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여름의 바람에 흔들리며 초록에 젖다가 가을 강변에서 붉은머리오목눈이가 가볍게 부벼대는 깃털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던 지푸라기. 얼었다 풀렸다 하는 겨울 강물 위로 떠밀려 강물 따라 떠돌다 머물다 하는 지푸라기. 어느 겨울날 시리고 시린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강물 위로 엎드릴 때 차가운 강으로 던져진 소년의 몸. 떠나려고 떠나야지 하고 모질게 생과의 작별인사를 하고 파르라니 떨어지던 밤송이 같이 단단하던 몸, 시퍼런 강물의 차가운 기세에 소스라치던 소년의 마음이 힘껏 손을 내밀어 붙잡은 나, 지푸라기. 서로의 심장으로 온기를 피를 흘려보낸 우리.
원앙식당 준비중 ⓒ로맨
# 중랑천 강가에서
강가에 갔어요. 모든 것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시월의 오후였죠. 강가의 억새들도 수굿하게 머리를 숙인 나무들도 어지러이 피어난 꽃들도 꽃들 사이를 부지런히 날개짓하며 오가는 벌과 나비들도 다 빛났죠. 오랜만에 아버지 의자에 앉아 윤슬이 부서지는 강을 한참 바라보았죠. 빗나가고 빗나가고 빛나는 삶. 이제니 시인이 시에서 그렇게 말했죠. 이 시를 중얼거리면 어쩐지 힘이 나죠. 빗나가고 빗나가기만 하는 삶인데 그게 또 빛나는 삶이라니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뭐 그만하면 괜찮아, 하고 말해주는 것만 같은 시죠.
강가에서 김선우 시인의 ‘지푸라기의 시’을 읽습니다. 지푸라기의 마음을 상상하며, 강물 위에 떠도는 지푸라기가 없나 찾아봅니다. 지푸라기 하나도 이렇게 열심히 한 생을 살고 있는데 나는 어디쯤 살고 있는 것일까, 되돌아보며 하염없이 그리움과 아쉬움에 젖습니다. 어느새 시월 끝자락이군요.
강둑에는 원앙 몇 마리 가을 햇살 아래 머물며 쉬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태의 원앙을 유심히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저 원앙은 어디서 왔을까? 어느 시공은 건너와서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있는 것일까?
한강은 저 원앙들을 지켜주기 위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새들의 쉼터를 만들고 거친 풀들을 정리해서 원앙식당도 준비했습니다. 이제 11월이면 원앙축제도 펼쳐질 거예요. 우리 곁의 원앙에게 당신은 어떤 마음을 내어주시겠습니까?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