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수요일 저녁에는 박혜영 교수님의 인문학 강의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강의가 <자아의 시대, 축복인가 고통인가?>다 보니 자아, 자의식, 자존감, 자기 계발 같은 단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특검에 소환된 전 영부인이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고 해요.
교수님은 뉴스를 보고 그리스 신화 속 오딧세우스 이름이 사실 ‘노바디’라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 덕에 식인괴물 폴리페모스를 죽일 수 있었지요. 괴물을 찌르자, 괴물이 이름을 묻습니다. 그는 ‘오딧세우스 (Nobody)’라고 대답하죠. 괴물이 친구 괴물들에게 도와달라고 소리치지만 자기를 찌른 자가 nobody라고 하니 어느 누구도 복수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고 해요.
어제는 문득 대학 은사님인 키스터 신부님이 에밀리 디킨슨 시를 보내주셨어요. 나는 노바디, 당신은 누구, 당신도 역시 노바디? 꽤 알려진 시죠. 신부님은 종종 카톡으로 안부를 물어오시죠. 그런데 어제 보내온 시에서 Nobody 그러니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있어 슬몃 웃음이 났습니다. 장영희 교수님은 간결한 시의 느낌에 맞게 ‘무명인’이라고 번역하셨지요.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 당신은 누구신가요? 당신도 아무 것도 아닌 사람? 이런 식으로 시를 여러 번 되풀이하며 읽다 보니 저 자신에게도 질문을 하게 되었어요. 당신은 누구? 당신도 아무 것도 아닌 사람?
자식같은 벼를 키우는 정지환 위원장 ⓒ.백나미
# 경찰서에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에게 묻다
에밀리 디킨슨의 이 시를 저는 20대에 처음 접했어요. 장영희 교수님이 가르쳐주셨죠.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어려웠는데 이 시는 그럭저럭 읽을 만했죠. 그리고 자존감이 낮은 스물두살 여자에게는 감정이입도 되는 시였죠.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별로 가진 것도 없고, 재능도 돈도 부족하고, 부모도 가난하고, 공부를 썩 잘하는 것도 아니고, 내성적이라 부끄러움도 많은 스물두살의 저는 과연 살면서 ‘아무 것도 아닌 nobody에서 somebody가 되는 날이 올까 막연히 상상해보기는 했어요. 좋은 소설을 써서 작가가 되어 somebody가 되고 싶다는 소망도 가졌죠. 하지만 그 시절로부터 30여년이 흘렀는데, 저는 여전히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이전과 비하면, 자존감은 꽤 높아졌어요. 좋은 친구도 많고 한강에서의 일도 즐겁죠. 그래도 유명인과는 거리가 멀죠.
누군가는 검찰에 출석하여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하던 날, 저는 경찰서에 출석했어요. 서울시 미래한강본부가 저를 고소했기 때문에 조사를 받으러 가야 했습니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조사에서 수사관은 기초 질문들을 많이 묻더군요. 인적사항은 물론이고, 종교와 재산, 가입 정당이나 단체, 주량과 흡연 여부, 종교와 건강 상태 등등 꽤 많은 것들을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서울시가 주장한 구체적인 범죄 행위들이 있는지 하나하나 꼼꼼히 물었습니다. 이를 테면, 샛강시민위원회에서 여러 가지 자발적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이로 인하여 현재 위탁업체가 프로그램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도록 업무 방해를 했다는 내용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서울시는 그 증거로 작년에 한강조합이 운영한 프로그램 운영실적에 비하여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음숲의 운영결과를 제시했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러 나서는 샛강지기들 ⓒ.정성후
난생 처음 받아보는 경찰서 조사였습니다. 하지만 두렵거나 떨리지 않았습니다. 범죄라고 할만한 일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다고 확고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에 더해서 저를 위하여 기도하고 곁을 지켜주는 동료들과 친구들, 조합원들과 샛강시민들이 계시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서울시가 선량한 시민들과 민간단체를 괴롭히는 일은 하루이틀은 아닙니다. Nobody로 평생 살아온 제가 할 수 없이 한강의 대표로서 서울시의 부당하고 불법적인 행위에 싸우게 되었습니다. 저의 양심과 동료들의 헌신, 시민들의 선의에 기대어 저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싸워나가려고 해요. 서울시 덕분에 어쩌면 제가 nobody에서 somebody가 될 지도 모르겠네요.
에밀리 디킨슨의 시 2연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How dreary - to be - Somebody!
How public - like a Frog -
To tell one's name - the livelong June -
To an admiring Bog!
얼마나 따분할까요 – 유명인이 된다는 건!
얼마나 요란할까요 – 개구리처럼 –
기나긴 6월 내내 – 감탄하는 늪에 대고 –
자기 이름을 외쳐대는 것은!
- Emily Dickinson
8월이 되고 한강조합은 조금 뒤늦게 상반기 평가와 하반기 계획을 마쳤습니다. 하반기에는 새로운 큰 사업을 시작하게 되고 활동 사이트가 늘어납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새로운 일을 성사시키는 동료들이 자랑스럽고 존경스럽습니다. 20명의 한강 활동가들은 폭염과 폭우의 시절도 잘 이겨나가며 쉼없이 일을 해나갑니다. 함께 해주시고, 만나신다면 격려의 말씀도 해주세요.
어제 입추였고, 요 며칠 공기가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시절도 언젠가는 다 지나겠지요. 선생님들의 삶에서도 폭염의 시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