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 제사가 아홉 반디라고… 4.3 사건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는 무지막지하게 쏴 죽이고…얼굴은 못 봤어도 좀 그러네…”
평소 단톡방에서 말수가 적은 편인 남동생 현욱이가 오늘 아침 카톡을 올렸습니다. 그제야 오늘이 할아버지 제사인 줄 알았습니다. 1948년 12월 29일. 나의 할아버지 조두영은 다른 마을 청년들과 같이 끌려가 고산리에 있는 밭 어디쯤에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1920년생 할아버지는 당시 29살, 그의 큰아들 우리 아버지는 9살이었습니다. 조두영은 조성동, 조성웅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중산간 마을 낙천리의 이십 대 청년들이 모두 끌려가 죽었던 1948년 12월 29일. 그 날 겨울바람은 차게 불었을까요. 흰 눈발이 내리고 있었을까요. 근처에서 까마귀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을까요.
총구를 앞에 두고 29살 청년 조두영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현욱이가 아침에 카톡을 올리는 오늘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그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그리워 했을까요. 무서웠을까요. 자포자기 했을까요. 집에 있을 어린 아이들을,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배추국을 끓이던 젊은 아내를 떠올렸을까요. 그도 아니면, 그 모든 것이 꿈이기를, 제발 살려주기를, 간절히 바랐을까요.
(2023년 12월 29일 쓴 ‘문학의 숲 편지’ 글에서)
오늘은 제주 4.3 77주기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아침 나절에 기분 좋은 목소리로 전화를 하실 테지요. 여기 4.3 추념식장에 왔져. 은덕이도 고찌 왔져. 대통령도 오고 하영들 와신게.
4.3 유족인 아버지는 언제부터인가 4.3 추념식 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하셨습니다. 딸이나 아들과 함께 줄지어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추념사를 듣던 아버지를 상상합니다. 제가 대학에 갓 입학한 91년에 “4.3이 머우꽈?” 물었을 때 “아무 말 말앙 공부나 허라.” 하시던 아버지. 가벼운 봄 점퍼를 입고, 햇빛을 가릴 모자를 쓰고 앉아 대통령의 말을 듣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4.3 추념식이 끝나면 은덕언니는 아버지를 모시고 명리동 식당이나 고산 횟집으로 갔습니다. 돼지고기 구이에 김치찌개를 먹거나 물회 한 그릇을 맛있게 드셨지요. 그리고는 당신이 혼자 사시는 낙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먼나무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 딸을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붉은 피와 동백의 땅
성후 샘이 4.3 관련 다큐영화 ‘목소리들’을 보고 나서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적으셨네요.
‘우선 먼저 든 생각은 앞으로 제주도에 "관광"하러 가기는 쉽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저토록 피로 범벅된 땅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한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10에 해당하는 2만5천여명의 희생자를 낸 무법천지의 4.3.’ (정성후 샘의 페이스북 글 인용)
제주 4.3은 오랫동안 말할 수 없는 국가폭력이었습니다. 성후 샘이 썼듯이 밝혀진 죽음만도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었죠. 그러나 빨갱이라는 낙인이 두려워, 피해자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할아버지 제삿날에 왜 그 작은 마을에 아홉 집이나 제삿날인지 몰랐으니까요. 1978년 현기영 작가가 <순이삼촌>을 써서 4.3을 알렸습니다. 그는 이 소설을 쓰고 끌려가서 고초를 겪기도 했지요.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제주 4.3 특별법’을 제정하고 나서야, 4.3 진상규명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그제야 4.3 유족임을 인정받았습니다.
일 년에 두세 번은 제주도에 갑니다. 제주에 가면 언니들과 올레길을 걷는 걸 좋아합니다. 오름도 자주 올라가죠. 한 번은 알뜨르 비행장 일대를 걷다가 은희언니가 우묵한 분화구 쪽으로 가리키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여기가 다 시체가 그득그득 했던 곳이야. 온통 피가 흘렀겠지… 그 때 은희언니가 그 말을 너무 심상하게 말해서 오히려 아찔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방에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고 들풀이 흔들리던 봄날의 오름에서 내던져진 시체가 켜켜이 쌓이고 그 아래로 피가 흘러내려 땅에 스며들던 시간을 상상했습니다. 그 피를 먹고 피어난 붉은 동백이 77번 피고 지는 세월동안 우리나라는 뭐가 달라졌을까요?
당장 내일 4월 4일은 대통령 탄핵 선고가 있는 날입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파면을 기다리며 안국동에서 광화문 찬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밤에 국민 앞에 총구를 겨눈 대통령이라는 자를 생각하면, 수많은 제주 도민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던 경찰들과 서북청년단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총구가 우리 할아버지를 죽였고, 아버지를 잃은 우리 아버지는 배고프고 거친 시절을 살았고, 그 아버지의 딸인 저는 되물림 된 상처를 안고 자랐습니다.
#샛강 계엄과 평화
(1인 시위중인 정지환 국장님을 지켜보는 보안관들 ⓒ.정성후)
4월 1일부터 샛강센터에는 보안관들이 출동하여 로비에 상주하고 있습니다. 센터를 오가는 시민들은 제복을 입은 그들을 경찰로 여기기도 합니다. 제복은 힘이 세지요. 저 역시도 그들을 처음 봤을 때 은근한 두려움이 먼저 들었습니다. 경찰이 쏜 총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피가 흘러서 그럴까요? 몸에 밴 두려움은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샛강센터가 있는 윤중로에는 연분홍 벚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건장한 체격의 보안관들이 지켜선 샛강은 이질감이 듭니다.
샛강 시민들은 이번 민간위탁 선정 결과를 두고 2.28 샛강 계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연과 시민을 내쫓는 민간위탁이라는 뜻입니다. 수달을 비롯한 야생동물을 지키던 한강조합이 쫓겨나면 누가 돌보게 될까요? 샛강에서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들어서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은 어떻게 될까요?
4월 들어 한강애인들은 샛강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고운 샘과 정순 샘은 책을 읽으며, 정지환 국장님은 세바시처럼 연설을 하며, 다른 이들은 손수 만들어온 피켓을 들고 길가는 시민들에게 말을 하는 방식으로 합니다. 시위를 마치면 같이 밥도 나누어 먹습니다. 그제는 정순 샘이 지리산 산나물과 청국장을 넉넉히 가져오셨고, 어제는 은희 샘이 직접 만든 물김치와 배추김치를 들고 왔습니다. 진영 샘은 과천에서 행복찹쌀떡을, 이상헌 교수님은 소금빵을 사오기도 했습니다. 저도 계란말이와 김치찌개를 가져갔지요.
샛강을 지키는 일이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일입니다. 멸종위기종 수달과 같은 생명들을 지키는 일, 샛강 공동체가 있어 비로소 행복한 삶이 시작되었다는 시민들의 평화를 지키는 일. 같이 밥을 먹으며 서로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키는 일. 그 일을 오늘도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