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눈을 감아보세요. 주위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요? 어떤 소리가 들리나요? 은미씨의 한강편지 367 💌 나는 제주 풀벌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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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눈을 감아보세요.
주위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요? 어떤 소리가 들리나요? 배음처럼 들리는 소리는 청솔귀뚜라미랍니다. 이맘때면 전국 어디서나 들으실 수 있어요. 오른쪽 방향에서 들리는 뚜렷하고 높은 소리가 들리나요? 그건 폭날개긴꼬리랍니다. 샴귀뚜리미, 왕귀뚜라미 소리도 중간중간에 들리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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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길을 따라 이쪽으로 가볼게요. 어두우니 발 아래를 조심하세요. 목소리는 낮추고 조용히 걸어갈게요. 불빛은 필요없어요. 걷다 보면 어둠도 익숙해지죠. 자, 여기서 멈춰볼까요. 멈추고, 가만히 눈을 감아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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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풀벌레 소리에 집중하며 미세한 파동 같은 게 느껴지나 보세요. 가만히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것이 어느새 우리 몸으로 진동처럼 흘러 들어오기도 하죠. 어떤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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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서대경 시 <차단기 기둥 곁에서> 부분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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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가끔 기이하고 신비롭죠. 위 시처럼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될 수도 있고, 그레고르 잠자처럼 벌레가 될 수도 있죠. 그리스 신화를 보면 변신 이야기가 넘쳐나죠. 이처럼 문학작품이나 신화를 접하면서 저는 변신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종종 아득한 마음에 젖어 나는 어떤 존재로 변신하게 될까, 상상에 빠지기도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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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제주 탐나라공화국에 갔어요.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우리는 춤을 추고 노래를 들으며 놀았죠. 그리고 나서 찾아온 밤의 시간. 양경모 대표님이 풀벌레들의 소리풍경으로 안내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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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눈을 감고 청솔귀뚜라미를 비롯한 무수한 풀벌레들의 합창을 들었어요. 그리고 소리가 파동이 되어 나에게 올 때 나는 분명 풀벌레와 하나가 되었죠. 풀벌레는 내 안에서 한참을 노래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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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화요일 밤에는 <나는 강이다> 영화를 보았어요. 영어 원제는 ‘I am the river, the river is me’라고 해요. 즉, 나는 강이고, 강은 곧 나다. 그런 의미죠. 세계 최초로 법인격을 부여받은 강인 뉴질랜드 북섬 황아누이강이 영화의 주인공이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과 연대하는 세계시민들이 나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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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이고, 강이 나라는 고백은 자연과 나의 하나됨을 말하죠. 제주도에서 내가 그 밤에 잠시 풀벌레가 되었듯이… 내가 바로 강이니, 나를 돌보듯이 강을 돌봐야 하고, 내가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하듯이, 강도 그래야 하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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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서로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하던 장면도 기억나요. 저는 어느 강이 있는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 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소개하더군요. 저는 살면서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소개한 적은 없는데 따라해보고 싶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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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홉 군데 연못이 있어 ‘물이 샘솟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제주도 낙천리에서 태어났어요. 저는 그 물에서 놀며 자랐고, 물뱀을 구경했으며, 연꽃과 개구리밥이 자라는 걸 보았죠. 또 그보다 더 오래 전에는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가 웃뜨르 새못에서 물을 길어와 밥을 짓고 우리를 키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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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철 매미 소리가 세상을 가득 채우더니 이제는 풀벌레 소리가 가을 밤을 채웁니다. 저마다 자신이 터잡은 땅에서 생명의 노래를, 그치지 않고 부르는 걸 보면 경이롭습니다. 작은 풀벌레로부터 우리는 삶의 신성함과 진지함을 배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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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님의 시 <귀뚜라미>로 편지를 마치려고 해요. 아마 그는 어느 여름날 도시 지라도 콘크리트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는가 봅니다. 그리고는 그 귀뚜라미 처지가 당시 당신의 고단함과 닮았다고 생각했을까요. 언젠가 말씀을 해주셨는데 기억은 정확하지 않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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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히 때로 청아하게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에 마음 기울이며,
이 가을 평안하시길 바랄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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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르르 뚜르르 인사를 전합니다.
2026.09.18
한강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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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_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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