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화양연화 시절이 있었지. 버드나무 물이 오르고 연초록 잎사귀들이 돋아나던 봄이었어. 그 봄에 나는
2026. 8. 27.
은미씨의 한강편지 365 💌 나는 새집
나에게도 화양연화 시절이 있었지. 버드나무 물이 오르고 연초록 잎사귀들이 돋아나던 봄이었어. 그 봄에 나는
은미씨의 한강편지 365 💌 나는 새집
나에게도 화양연화 시절이 있었지. 버드나무 물이 오르고 연초록 잎사귀들이 돋아나던 봄이었어. 그 봄에 나는 숲에 살았지. 봄의 기척, 냄새, 감촉을 느끼며 알 수 없는 설렘에 가슴이 천방지축으로 뛰곤 했지. 내 존재 이유는 뭘까. 나는 어쩌다 이 숲에 오게 되었을까. 내 삶이, 가치있는 삶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은 긴긴 봄밤에도 이어졌지. 어디선가 연분홍 꽃잎이 바람결에 날아오기도 하고, 낭창낭창 부드러운 버들가지가 내 앞에서 바람 따라 흔들리던 그런 밤에도. 어느 봄날 박새 한 마리 나에게 날아왔지. 나에게 작은 두 발을 걸치고 갸우뚱하는 표정으로 탐색했지. 나는 시치미를 떼고 모른 체 했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어. 단번에 너무 많은 마음을 내어주면, 슬픈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너에게 반해서 온통 마음을 주었는데, 너는 그냥 훌쩍 날아가버릴 수도 있으니까. 너는 새이고, 자유로우니까.
나는 새집. 나의 운명은 어느 순간 나무의 숙명을 닮았지. 얕은 강이 흐르는 그 숲에서 튼튼하게 자란 뽕나무 굵은 둥치 위로 갈라진 가지 사이, 나는 놓여졌지. 허리와 등은 단단한 끈으로 나무에 묶였어. 이내 우리는 체온을 나누었지.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편안한 온기. 나무 자체의 은근한 체온. 또르르 촤르르 사악사악 삐이삐이 숲에서는 끝없이 소리와 기척이 있지만 나무 위에서 나는 꿈을 꾸며 자곤 했어.
나는 새집. 나의 운명은 어느 순간 나무의 숙명을 닮았지. 얕은 강이 흐르는 그 숲에서 튼튼하게 자란 뽕나무 굵은 둥치 위로 갈라진 가지 사이, 나는 놓여졌지. 허리와 등은 단단한 끈으로 나무에 묶였어. 이내 우리는 체온을 나누었지.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편안한 온기. 나무 자체의 은근한 체온. 또르르 촤르르 사악사악 삐이삐이 숲에서는 끝없이 소리와 기척이 있지만 나무 위에서 나는 꿈을 꾸며 자곤 했어.
작은 새의 몸조차 커다란 우주 같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했지. 작은 새의 작은 구멍이 열리고, 작은 알들이 하나씩 그 몸에서 밀려 나올 때, 나는 숨을 죽이고 어쩐지 긴장이 되었지. 숲길을 지나며 떠드는 사람들이 야속했지. 잠잠히 지나가요. 지금 박새가 알을 낳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내 말을 듣지 못하지.
# 샛강 겨울이 지나고
일곱 개의 작은 알들은 껍질을 깨고 나왔지. 엄마의 헌신과 사랑으로 아가들은 잘 자랐지. 엄마가 벌레를 물고 돌아올 때마다 내 몸은 얼마나 들썩이는지, 나는 기뻐서 간질간질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았지. 내 안에 깃든 그들과의 시절이 내 삶의 화양연화. 벚꽃이 지고 라일락이 피기 시작할 때 그들은 내 곁을 떠났지.
모두가 떠나고 빈 집으로 지냈지. 몇 달이 지났을까. 어떤 손길이 나를 데려갔지. 샛강센터 지하 구석에서 나는 다른 새집들과 같이 선반에 놓였지. 아랫단에는 삽과 갈퀴 같은 것들이 있었고. 그곳에서 기다렸어. 겨울이거나 초봄이 되면 다시 나를 숲 속으로 데려다주기를 바랐어. 새단장을 해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고 싶었지. 하지만 겨울에도 새로운 봄에도 뜨거운 여름에도 내내 그곳에 있었지. 아무도 나에게 오지 않았지. 아이들의 떠들썩함도 어른들의 분주함도 더 이상 없었지. 그 창고에서 길고 지루한 날들을 살았지. 먼지 더께가 내 위로 쌓이고 나는 남루하고 더러워졌지. 어린 박새들의 지저귐, 엄마 박새의 온기를 품고 살았던 시절은 아득히 꿈만 같았지.
며칠 전 갑자기 창고의 문이 열렸어. 어떤 남자가 내게 다가왔지.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야. 지난 봄에 내가 살던 숲속에 자주 찾았던 그 남자였어. 그 남자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더군. 내 아래 삽과 갈퀴를 꺼내 치우던 그는 나를 바라보았어. 머뭇거리던 그는 내 머리의 먼지를 쓸었지. 그리고 소중한 것을 안듯이 두 손으로 나를 옮겼지.
나는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다시 새들이 사는 숲으로 가게 될까? 다시 어린 새들의 작은 기척을, 뛰노는 심장을,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 나는 삽
6년 동안 샛강에서 일했어. 내 숙명이 노동이지만 이곳에서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봄여름가을겨울 언제나 일을 했어. 쉬지 않았지.
나는 삽. 2019년 봄에 처음 샛강에 왔지. 당시 노을공원시민모임 강덕희 국장이 샛강에도 나무를 심겠다는 한강조합을 위해 보내준 200개의 삽 중에 하나가 나였지.
봄부터 가을까지는 땅을 자주 팠어. 어린 나무들을 심었지. 폭우에 망가진 길을 고치거나 강물에 부유 쓰레기가 많을 때도 나는 일했지. 샛강 뽕나무숲에서는 강물에 세굴되어 뿌리가 드러난 나무를 위해서도 일했어. 부지런히 흙을 날랐지. 무척 고된 일이었어.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6년은 금새 흘렀어. 하지만 놀라워라. 황량하던 그곳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지고 원시 자연이 살아있는 비밀의 숲이 되었지. 내 삶은 그 숲의 일부였지.
지금 내 옆에서 트럭에 흔들리며 가고 있는 갈퀴도 마찬가지야. 무척 덥던 여름에 사람들이 그와 함께 덤불 속으로 들어갔어. 갈퀴와 낫을 들고 가시박 줄기를 걷어내고 잘랐지. 내가 심고 키운 나무들을 살려주기 위해서였지. 앞장서던 어느 여자는 벌에 두 방 쏘이며 눈이 퉁퉁 부어 물러났지.
우리는 모두 오랜 동안 영문도 모른 채 컴컴한 지하창고에 갇혀 있었어. 그리고 며칠 전 샛강을 영영 떠나게 되었지. 우리는 이제 어느 강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까?
# 안녕 샛강
오늘 샛강센터에서 짐을 뺐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이어 두번째 짐입니다. 봉고트럭의 바닥을 채운 정도 분량입니다. 특히 오늘 물건은 샛강시민들이 공원을 가꿀 때 쓰던 것들입니다. 서울시는 '샛강시민'을 우리 조합의 소속 모임이라면서 이들 짐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치우라고 해서 그리한 것입니다.
마음같아서는 하나라도 덜 들고 오고 싶은데, 먼지를 탱탱 뒤집어 쓰고 있는 삽이며 새집 같은 걸 버려두기도 그래서 제법 들고 왔습니다. (그래봐야 전체의 1/20에도 미치지 못하고, 대부분 과거부터 있던 것들인데 이를 문제 삼으니 치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