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바쁘게 보낸 날이었죠. 아침엔 한강 전직원이 모여 회의를 했어요. 회의를 마치곤 5월에 태어난 분들 생일 축하도 하고 점심도 먹었어요. 오후에는 한강 활동 공유회가 있었고, 옥상에서 푸짐한 밥상을 차려 대접했어요. 연이어 ‘공자와 샛숲을 거닐다’ 논어 강의가 열렸고 모든 정리를 마치고 샛강센터를 나서니 밤 10시를 넘겼군요.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집이 한없이 멀게 느껴져요. 지친 몸을 창가에 기대어 졸다 깨다 하며 가요. 덥고 갑갑한 기분이 들어 창문을 살짝 열었어요. 어느 순간 열린 창문으로 달콤한 아까시 꽃향기가 물씬 풍기네요. 시원한 밤공기에 실려오는 아까시 향기에 취해 문득 돌아가신 장영희 선생님을 떠올렸어요. 사실 지난 주부터 내내 선생님 생각을 했어요. 선생님은 5월 9일에 돌아가셨고, 또 오늘은 스승의 날이니까요. 선생님은 대학 시절 저를 아껴주시고, 문학의 기쁨과 힘을 가르쳐주신 분이죠. 선생님이 가르치던 서강대 뒤편 노고산에도 이 즈음에는 아까시나무들이 향기로운 꽃을 가득 피우곤 했어요.
(한강 공유회를 마치고 ⓒ.김명숙)
#다시 일어설 힘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히 죽을 힘을 다해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난 확신한다.’
(장영희 책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샘터 P.316)
지난 토요일엔 한강유람단과 금강 무주 강길을 걸었어요. 일기예보와는 달리 온종일 비가 내렸죠. 가랑비와 부슬비가 번갈아 내리고 바람도 불었어요. 남쪽이라 따뜻하겠지 싶어 얇은 옷만 입고 갔던 터라 비바람 속을 걸을 때는 추웠어요. 신발은 이내 젖어 축축해지고 말았어요. 그래도 내내 밝은 미소로 길을 이끌어준 최수경 소장님 덕에 기분좋게 걸었어요. 가까이 강을 끼고 둘러선 산에는 신령한 안개구름이 허리를 감싸고 있고, 강물은 명랑하게 여울지며 흐르고, 사방에는 꽃들이 피어났어요. 걸어갈수록 눈앞에 펼쳐지는 비경에 숨을 멈추고 걸음을 쉬었죠. 꽃향기가 숲에 가득하고 신록이 깊어진 나무들 때문에 우리 몸에 초록 물이 드는 것 같았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저는 이렇게 소감을 말했어요.
“종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춥고 불편했어요. 보세요. 신발도 다 젖었어요. 그런데 한강유람단 분들이 함께 하니 이런 궂은 날에 온종일 강길을 걸어봤어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예요. 혼자라면 절대 하기 어려운 경험이죠. 이렇게 비가 내리니 숲의 나무들은 더욱 짙은 향기를 내뿜었어요. 우리는 자연을 더욱 깊이 느끼고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어요.
인생이란 그런 것 같아요. 좋기만 한 것도 나쁘기만 한 것도 없어요. 어떤 나쁜 상황이 있으면 또 그 안에 좋은 일들이 생기기도 하죠. 오늘 궂은 날씨 덕에 우리는 더욱 내밀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렸으니까요. 우리 한강조합이 여의도샛강생태공원에서 겪는 일들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올해 민간위탁에서 당연히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민간위탁이 안 된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비로소 샛강의 가치를 새로이 보게 되었어요. 샛강을 아끼고 지키려는 한강애인들의 힘을 매일 느끼고 있어요. 우리 한강이 만들어온 공동체가 얼마나 멋진 공동체인지 알게 되었죠. 그래서 저는 앞으로 샛강에서 서울시와 싸울 것이 아니라, 한강애인들과 즐겁게 잘 사는 일을 하겠습니다.”
(선유도에서 우중 자원봉사 ⓒ.박찬희)
#다정한 한강애인들과
샛강에서 아무런 사업비가 없는 우리는 선유도공원과 여의도공원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샛강이 서울시 직영으로 운영되는 4월부터 재학, 찬희, 병언, 정민과 같은 생태공원팀이 수시로 선유도와 여의도를 드나들며 할 일을 찾았어요. 그리고는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기도 하고 기업들과 봉사활동을 시작했어요.
지난 금요일에는 온종일 비가 내렸는데도 선유도에서 자원봉사를 했어요. 이영원 선생님과 이원락 선생님이 오후에 달려와 주셨어요. 비옷을 입었지만 다 젖고 말았는데도 몇 시간 내내 쓰레기를 치우고 생태교란종 마른 덩굴을 걷어냈어요. 이원락 선생님은 옷은 다 젖었지만 끝나고 막걸리를 마신 것이 그렇게 좋았다고, 한강조합은 평소 뒷풀이가 없는 게 아쉬웠다고 말하는군요.
이번 샛강 위기 덕에 이원락 선생님의 매력과 인품을 알게 되었어요. 지난 달 어느 일요일, 샛강현수막을 강제로 철거한다는 소식에 남산으로 놀러가다가 급히 돌아와 지켜주셨죠. 비오는 금요일 오후인데도 자원봉사자가 없으면 곤란하니 도와달라는 찬희 과장의 호소에 회사 일을 하다 말고 와주셨어요. (모르긴 몰라도 막걸리값도 내셨을 거예요.)
(같이 걷는 김영 고문님과 이원락 샘 ⓒ.최수경)
금강 트레킹을 가서도 여러 번 감동했어요. 얇은 옷은 입은 강고운 샘에게 겉옷을 벗어줬어요. (고운 샘은 그걸 또 벗어서 딸에게 입혀주었죠.) 무주 강길은 꽤 길었는데, 김영 고문님은 나중에 다리가 풀렸다고 해요. 그걸 알아채고, 곁에서 부축해서 끝까지 걸으실 수 있게 도왔어요.
금강을 걸으며, 최수경 소장님에게도 내내 감탄했어요. 15년이 넘도록 금강을 드나든 그녀는 가히 금강의 여인이죠. 그녀는 환경교육 박사이고 생태관광 전문가지만 한강애인으로서 그녀는 맑은 얼굴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아이 같은 분이죠. 우리에게 금강의 매력을 잘 보여주려고 혼자서 미리 답사하고 준비하고… 성심당에서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서 소보로 빵을 45명 인원수만큼 사오기도 했어요. 길을 걸으며 누가 낙오되지는 않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내내 살피고 이끌어 주셨어요.
이처럼 멋진 한강애인들이 계신 한강조합에 대해 자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어요. 임설희 선생님은 샛강 사태가 생기고 나서 토론회 같은 걸 하자고 먼저 제안하신 분. 그 덕에 어제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활동 공유회 - 한강의 오늘을 품고 내일을 말하다>가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임설희, 이강인, 김진형 선생님들의 주도와 이상헌, 김선희 한강애인들의 지지로 오롯이 한강애인들이 준비한 공유회였어요.
아까시 꽃보다도 더 향기롭고 다정한 한강애인들과 5월도 잘 살고 있습니다. 올해 초에 샛강 민간위탁을 준비하며 제가 한강편지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올해도 찔레꽃 피는 샛강의 봄을 보고 싶다고요. 그제 저녁 샛강을 걸으니, 사방에 찔레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비록 울퉁불퉁 돌아가는 길을 걷고 있지만, 소원대로 샛강의 찔레꽃을 보고 있네요.